#전편 ‘눈 맞은 배추와 울돌목의 울부짖음...해남의 겨울’에서 이어진 글.
영웅 이순신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울돌목에서 자동차를 타고 20분 정도 달리자 우항리 공룡박물관 입구가 보였다. 우항리는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던 바닷가였다. 금호 방조제가 들어서면서 담수호를 낀 육지로 변했고, 덕분에 퇴적층이 드러나고 퇴적층에 있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달린 새발자국 1000여 점과 세계에서 가장 큰 익룡 발자국 300여 점, 정교한 공룡 발자국 500여 점이 한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유명하다. 박물관은 지난 2007년도에 문을 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큰 공룡 두 마리가 박물관 외벽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재미있어 나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이 터졌다. 무심코 '저 공룡 이름이 뭐지'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옆에 있던 꼬마가 "말라위 사우르스예요"하고 가르쳐 주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갖가지 공룡 모형과 뼈 모양 화석 등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잘 띈 건 육식 공룡 티라노사우르스가 초식 공룡을 공격하는 모형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쥬라기공원'에서처럼 티라노는 사나운 눈을 번뜩이며 곧 잡아먹을 기세로 서 있고, 초식 공룡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 괴성을 지르며 살짝 움직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관람객들은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
마침, 좀 전에 공룡 이름을 알려 준 꼬마가 옆에 있기에 "티라노사우르스가 제일 센가보다"하고 말을 걸었더니 그 꼬마는 "아니요, '기가노트 사우르스'가 티라노보다 더 커요. 진짜 싸우면 기가노트가 아마 이길걸요"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공룡 박사 같은 꼬마의 나이는 9살.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그 꼬마는 '관광해설사'처럼 공룡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다. 그 꼬마에게 들은 공룡 이름만 해도 수십 가지인데, 기억력이 쇠약해진 탓인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기가노트사우르스' 하나뿐이다. 아직 머리가 여물지 않은 9살 꼬마가 어떻게 그 복잡한 공룡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우항리 박물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제법 굵은 눈발까지 내리니 갑자기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졌다. 다음 행선지인 '땅끝 관광지'를 포기하고 숙소로 향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며 여행자의 하루도 저물어 갔다.
두륜산의 맑은 공기 덕에 일찍 잠에서 깼다. 방문을 여니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왔으니 올라가야 할 텐데! 온 산을 뒤덮고 있는 하얀 눈을 보니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졌다. 아이젠이 없다는 것을 핑계 삼아 등산을 포기하고 그 대신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눈 때문에 모두 등산을 포기했는지, 케이블카는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로 넘쳤다. 눈꽃이 활짝 핀 산에 취해 "멋지다"를 몇 번 되뇌자 케이블카가 멈춰 섰다. 목적지인 전망대 인근에 도착한 것이다. 난간마다 자물통이 빽빽이 매달려 있는데, 자세히 보니 이름과 하트 모형 등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연인들이 '우리 사랑 영원하기'를 소원하며 매달아 놓은 듯했다.
목재 산책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 전망대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은 날엔 제주도 한라산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그날은 한라산 대신 온 산에 가득 핀 눈꽃만 시야에 들어왔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눈꽃이 핀 두륜산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두륜산을 마지막으로 해남 관광지 순회를 끝냈다. 땅끝 관광지를 못 본 게 못내 아쉽긴 하지만 남녘의 정취를 한껏 누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고, 소름이 끼치도록 행복한 시간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오마’는 다짐은 남겨 두었지만, 남녘의 따뜻함을 내 몸이 기억하는 때문인지 돌아오는 발걸음은 아쉽기만 했다.
우항리 공룡박물관 9살 꼬마 해설사, 사실은 아들이다. 지금은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건장한 체격의 20살 청년이 됐다. 11년 전 여행기를 쓸 때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던 꼬마’라는 이름으로 글에 등장시켰었다.
당시 아들 녀석 관심사는 온통 ‘공룡’이었다. 공룡에 대한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었고, 덕분에 9살 나이에 영화 쥐라기 공원에 나오는 대부분의 공룡 이름을 달달 외울 정도의 ‘전문성(?)’을 갖출 수 있었다. 해서, 혹시 공룡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10살 정도가 지나면서 공룡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은 공룡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11년 전 여행기를 다시 꺼내 읽기 전만 해도 나 역시 아들이 공룡에 굉장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여행기를 읽으면서 아들 녀석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행기를 쓴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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