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읽은 책을 펼쳐보면 참으로 놀랍게도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다. 그렇다고 선뜻 다시 읽을 마음이 나지는 않는다. 여행도 마찬가지. 오래전에 다녀온 여행에 대한 기억 역시 선명하지 않다. 사진을 보면 어렴풋이 무엇인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흐릿하기만 하다. 이럴 때 꺼내 읽는 게 여행기인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행기를 쓴 보람을 느끼게 된다. 여행기를 왜 써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도 있다.
해남을 다년온 것은 10여 년 전인 2013년 12월이다.
전라북도 군산을 지날 즈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싸락눈이 갑자기 함박눈이 됐고, 어느 순간 진눈깨비로 변했다. 간간이 눈 폭풍이 몰아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시야가 하얀 장막에 가린 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우와, 이거 환상적이네. 눈이 나한테 달려드는 것 같아, 정말 아름다워."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서 땀이 흐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태평하기만 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여행이 주는 설렘만 가득한 듯했다.
"환상적? 네가 한 번 운전해 볼래, 그때도 환상적이란 말이 나오는지."
"운전하기 힘들어? 잘 달리기에 이 정도 눈쯤은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지. 그래도 쌓이지는 않잖아. 정신 바짝 차리고 운전해."
그러고 보니 함박눈이 내리든 눈 폭풍이 몰아치든 도로에 눈이 절대 쌓이는 일은 절대 없었다. 따뜻한 남녘이라 그런지 눈을 쏟아내던 하늘이 갑자기 비를 쏟기도 하고, 뜬금없이 눈부신 햇살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땅끝마을' 해남에서 절정을 이뤘다. 펑펑 내린 눈이 따뜻한 남녘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땅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기를 거듭했다.
딱 한 번, 눈이 쌓인 풍경을 보기는 했다. 여행 둘째 날 아침, 두륜산 국립공원 부근이 밤새 내린 하얀 눈에 파묻혔다. 하지만 그마저도 채 두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과연 남도였다. 이런 따뜻한 기후가 '월동 배추'라는 해남의 명물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해남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배추가 눈에 띄었다. '월동 배추'를 알 턱이 없는 내 눈엔 아까운 배추가 밭 가득히 버려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해서 "왜 아까운 배추를 밭에다 버려두느냐?"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묻자 연세 지긋해 보이는 식당 주인(여성)이 이렇게 말하며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말했다.
"그 아까운 배추를 버리긴 누가 버린다요. 고것이 월동 배추란 거요. 저 속이 월매나(얼마나) 단지(달은지) 아요(알아요)? 한겨울 눈을 맞으면서 배춧속이 꽉 차면 1월이나 2월쯤에 뽑아서 김장을 하는 거요. 참말 맛있지라."
그 유명한 '월동배추'도 모르냐고 따지는 듯한 말투였다.
"다 얼어버릴 텐데, 어떻게 김장을 하지요?"
"아따, 얼지 않으니까 밭에다 두지요. 해남이 따뜻하지 않어요. 야중에 한번 사먹어 보소, 그 뭐냐 피부에 좋다는 섬유질인가 뭔가가 아주 많다고...도시 사람들한테 아주 인기가 끝내준다고 않어요."
인간 이순신의 고뇌가 묻어 있는 '울돌목'
허기진 배를 채우고 첫 목적지인 우수영 관광지로 향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곳이다.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울돌목은 거센 물결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우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울돌목과 같은 뜻인 명량(鳴梁)이라고 불렀다.
바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울돌목을 바쁘게 지나가는 물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바람 소리인지 물소리인지 분명치 않지만 분명 무엇인가 울부짓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순신 장군 어록 중 가장 유명한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도 바로 이 울돌목에서 나왔다. 이순신 장군은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 외치며 적군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하들을 독려했다.
충무공은 이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적극 활용했다. 적을 이곳까지 유인해서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을 물리쳤다. 이때 대파된 적선은 31척이고, 전함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적선은 92척이다. 이는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승리다.
그런데, 어째서 배가 13척 밖에 없었을까?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잃고 백의종군하던 처지였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왜의 수군한테 대부분 패해, 막강하던 해군력을 깡그리 상실했고 원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 재상 유성룡 등의 간곡한 건의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지만 남아 있는 전함은 겨우 12척뿐이었다. 이를 본 백성들이 어디선가 한 척을 가지고 와 이순신에게 준다. 이렇게 해서 이순신 장군은 13척으로 소박한(?) 함대를 꾸리게 된다.
지금은 신처럼 추앙받고 있지만, 이순신은 분명 인간이었을 터. 13척을 가지고 수백 척의 적 함대를 맞아야 하는 그의 인간적인 고뇌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이런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고뇌가 울돌목에 동상으로 표현돼 있다.
그래서 이 동상은 갑옷 차림이 아닌 관복 차림이고, 손에는 칼이 아닌 지도가 들려 있다. 이 동상은 밀물 때는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썰물 때는 주춧돌 최하단까지 드러난다. 동상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고뇌하는 모습, 가장 인간다운 이순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충무공 어록비에 쓰여 있는 글귀다.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란 뜻이다. 충무공의 서한문에 기록돼 있는 이 글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의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왜군이 몰려오자 조선 육군은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하고 패퇴에 패퇴를 거듭했다. 당시 조선 육군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는 왜가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고, 2달 만에 전라도를 제외한 거의 전 국토를 유린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수군도 마찬가지였다.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난이 발발하자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경상 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 하자 전선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오로지 건재한 곳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호남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약 한 달 만인 1592년 5월, 옥포 해전에서 승리해 조선에 첫 승전보를 전하고, 7월에 한산도 대첩에서 승리, 왜의 보급로를 끊어 버린다.
이에, 왜는 조선 수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전라도에 부대를 보내지만 진주에서 대패(진주대첩)한 이후 더 이상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된다. 그 이후 전라도는 전란 기간 내내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 조선을 보전한 거점이 됐다. '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충무공의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닌 이유였다.
해남을 여행 하기 전, 내가 알고 있는 해남에 대한 지식의 전부는 ‘땅끝마을’이라는 것뿐이었다. 눈으로 보고 느끼지 못했다면 눈 맞은 배추로 김치를 담근다는 사실, 그 배추가 굉장이 맛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명량해전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는 것 또한 큰 수확이다. 몇 해 전 최민식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명량’을 난 무척이나 흥미롭게 감상했는데, 그 이유는 울돌목의 물살을 직접 느껴 본 덕분이었다. 또 13척의 배로 적을 맞아야 하는 당시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고뇌에 대한 이해가 있어 영화가 마치 내게 닥친 현실처럼 다가왔다.
해남을 떠나면서 ‘언젠가 꼭 다시 오겠노라’ 맘속으로 다짐했지만, 그게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여행 계획은, 우선 가보지 않은 곳을 중심으로 짜게 돼 있어서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게, 여행기란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 쓴 여행기를 찾아 읽으며 따뜻한 남도의 겨울을 느껴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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