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소담스럽다. 낙엽을 벗어 던지고 ‘나목(裸木)’이 된 가로수가 흰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무’가 되었다. 따뜻해 보인다.
한적한 골목길에 내 발자국을 길게 남기며 걷고 싶어, 옷자락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걷다 보니 어느새 산자락. 다리가 뻐근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눈만 오면 난 걸었다. 무엇인가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이 어린 나를 하얀 세상으로 이끌었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좋았고 발뒤꿈치에 하얀 발자국 남기는 일도 즐거웠다.
눈만 오면 쏘다니는 어린것이 못내 불안했는지, 아버지는 눈이 아주 많이 내린 어느 날 ‘하얀 여우’ 이야기를 해 주셨다.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발을 묶어 두려는 의도였다. 내 나이 고작 11살이었으니까.
"영환이 아저씨 알지? 그 아저씨 예전에 뻐국산을 넘어가다가 하마터면 큰 변을 당할 뻔했단다. 눈이 하얗게 내린 밤에 뻐국산을 넘다가... 아, 글쎄 길을 잃어버렸다지 뭐니. 아무리 걸어도 그 길이 그 길 같더래, 그러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갑자기 눈처럼 하얀 여우가 나타나서는...만약 그 때 정신을 잃었다면 그 여우한테 잡혀 먹었을 텐데 다행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서 변을 당하지 않았단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하얀여우가 사람들을 홀려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지쳐 쓰러지면 그 때 잡아 먹는거야."
정말 흥미있었지만, 요정도 이야기로 발랑 까진 11살을 겁줄 수는 없었다. 귀신 이야기 단골 드라마 ‘전설의 고향’을 보면서도 ‘뻥 치시네’ 하며 콧방귀 뀌는 11살이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기 싫어 무서운 척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버지는 막내아들 뱃속에 능구렁이가 열 마리쯤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작전 성공’이라는 듯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12살, 13살이 되어서도 ‘어린것의 마실’은 멈추지 않았다. 눈만 내리면 신발 끈 고쳐 매고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산에서는 꿩을 만났고 들에서는 청둥오리를 만났다. 잡아보려 애쓴 적도 있지만, 녀석들이 나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깨우친 뒤부터는 애쓰지 않았다. 자세히 볼 수 있게 천천히 날아가기만을 바랐다.
15살 즈음부터는 꿩이나 청둥오리가 아닌 사람, 그것도 친구를 만나러 다녔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이심전심 마음이 통해 같이 걸어준 친구도 있고, 몸을 녹이라며 뜨끈한 아랫목을 내준 친구도 있다. 털이 복실 거리는 이불을 덮고 아랫목에 누워 어지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성에 이끌릴 나이가 되어서는 벙어리장갑을 좋아하는 단발머리 소녀와 걷는 모습을 꿈꿨다. 소녀와 나의 발자국이 나란히 흰 눈에 찍히는 모습만 상상해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첫사랑이라던가. 그 아쉬움을 삭히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11살 어린것에게 하얀 여우 이야기를 해 준 무심한 듯 정 많은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눈을 맞으며 같이 걸어주던 친구, 아랫목을 내주던 친구는 아주 멀리 있어 함께 걸을 수도, 이불을 덮고 누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벙어리장갑을 좋아하는 단발머리 소녀는...어느 하늘아래에선가 잘 살고 있겠지.
쉰이 넘었는데도 눈만 보면 걷고 싶어진다. 눈과 함께 그리움이 밟혀 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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