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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통영] '문어라면'의 유혹, 살찌는 소리는 들리고

by 사이먼 리 2024.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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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통영 시내로 나갔다.

 

우선 배를 채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숙소 호스트가 맛집으로 추천한 식당을 찾았다. 작은 횟집이었다. 문을 열자 어서 오세요하는 반가운 음성이 아닌 식사 하시려고예라는 살짝 당황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놀랍게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탁자 사이에서 연세 지긋한 한 여성이 몸을 일으켰다. 손님이 없는 새 잠시 누워 잠을 청한듯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즈음.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아직 영업 전인가 보네요하고 나가려 하자 그녀는 아닙니더, 영업합니다라고 말하며 부리나케 앞치마를 둘렀다. 우리가족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 식당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린 통영시내를 둘러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뭐 재미있는 거 없을까하는 바쁠 것 하나 없는 여행자의 발걸음이었다.

 

커피숍, 술집, 옷가게...눈요기를 할 수 있는 풍경이 쭉 이어졌다. 재래시장에 가면 뭔가 흥미로운 게 있을 것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재래시장을 알리는 이정표나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우리 일행 곁을 지나는 한 여성에게 재래시장 위치를 물으니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경상도 사투리로 길을 가르쳐 준다.

 

“쭉 가서예, 쪼오기서 오른쪽으로, 횡단보도 건너서 쫌만 가면 북신시장이 나옵니더.”

 

시장에 전시된 것은 건어물, 생선 같은 바다에서 나온 먹을거리가 대부분. 모자, 신발 같은 생활용품 매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문어 떨이...”

 

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연세 지긋한 시장 아지매. "이 정도 크기에 3마리 2만원이면 거저"라며 "가져가"라고 말했다. 눈빛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잠시 즉석 가족회의. 야식으로 문어 라면을 끓여 먹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좀 전에 생선 매운탕을 먹었는데, 어떻게 또라는 내 의견은 먹성 좋은 아이들 의견에 묻혔다.

 

문어를 사겠다고 하자 아지매는 놀라운 칼질로 문어 내장을 긁어냈다. 신기하게도 내장 없는 문어는 꿈틀꿈틀 거리며 자기가 살이 있음을 과시했다. 이런 상태로 몇 시간을 더 산다는 아지매 말에 우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슈퍼마켓에서 라면을 사면서 생각해보니 숙소에 젓가락, 숟가락이 있었는지 가물가물 했다. 일회용 숟가락 젓가락 한 묶음을 쇼핑백에 넣으려는 찰라 가족 증 누군가 기념품 산다 생각하고 이거 사는 게 어때?”라고 말했다. 제법 예쁜 모양 젓가락 숟가락 5개 들이 한 묶음 이었다. 잠시 가족회의. 만장일치로 우린 일회용품 대신 기념품용 수저 세트를 사기로 결정했다.

 

재래시장 투어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해 혹시 숟가락 젓가락이 있나 찾아보았다. 대여섯 명이 식사를 해도 될 만큼 많은 수저가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었다. ‘어째서 우린 저 많은 것을 보지 못했을까!’

 

숙소에는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는 가스렌지, 전자렌지에 쟁반, 과도, 밥상까지 준비돼있었다. 문어 라면을 끓여 김치에 곁들이니, 정말 색다른 맛이 느껴진다. 라면 한 젓가락에 김치, 문어 한 점, 그리고 맥주 한 모금.

 

대학생 딸이 아 이거 살 많이 찌겠는데라고 하자, 중학생 아들 녀석 늘 하던 대로 내일부터 빼면 되지라고 유혹한다. 딸은 못 이가는 척 그래, 여름휴가인데라며 젓가락질 삼매경에 빠져든다. 통영에서의 첫날밤은 이렇게 살이 찌는 소리와 함께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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