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사랑 긴 그리움
네모 (2012년 작)
며칠째 나는 온 종일 그 황홀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움 이란 게 이런 감정이었던가! 계속 가보고 싶은 마음에 그날처럼 그곳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얼마 전 작은 아이(둘째)와 함께 낙선재(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동쪽에 있는 건물)에 다녀온 다음부터이다.
다시 가고 싶어 참을 수 없었기에 만사 제치고 집을 나섰다. 지난번에는 물과 김밥 몇 줄만 챙겼지만 이번엔 준비가 달라야 했다. 우선 발톱에 있는 반짝이는 매니큐어를 지웠다. 그 다음 흙길을 느낄 수 있는 투박한 고무 샌들을 신었다. 이렇게라도 옛사람 되어 그곳의 주인이 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한가한 시간대를 찾아 낙선재로 들어섰다. 오후 4시경, 한여름 같은 뙤약볕이 물러가고 부드러운 봄볕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손끝만 살짝 잡은 연인은 문턱 넘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진작가의 기분 좋은 셔터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낙선재는 서울의 5대 궁궐 중 창덕궁 안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이다. 1847년 조선 24대 임금이었던 헌종 때 지어진 건물이다.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 이렇게 세 채가 연속으로 연결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집 뒤에는 각각 후원도 딸려 있다.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 일원이라 부르면 된다.
오랜 세월을 머금은 짙은 나무와 하얀 창호지만으로 이루어져 부드럽고 소박했지만 왕가의 위엄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궁궐내의 다른 건축물과는 다르게 단청을 입히지 않았으며 주택형식 또한 사대부 집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헌종의 검소한 성품이 잘 나타난 모습이다.
그(헌종)는 이곳에 진귀한 서적과 서화들을 가득 채워 놓고 감상하면서 조용히 머물렀다고 한다.
내가 이곳을 그토록 그리워한 것은 낙선재 곳곳에 깃들어 있는 하고 많은 ‘사연’ 때문이다. 낙선재는 참으로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다. 이제는 주인이 나타날 수 없는데도 ‘사연’만을 부둥켜안은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선재 일원 석복헌(헌종이 경빈 김 씨를 위하여 지은 곳)의 첫 주인이었던 경빈 김 씨는 사대부 출신으로 헌종이 평소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었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왕이 직접 간택 절차에 참여했고, 후궁으로 맞이했다.
헌종의 첫 째 왕비인 ‘효헌왕후’는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다시 왕비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간택의 결정권이 대왕대비에게 있었다. 대왕대비는 경빈 김 씨 대신 ‘명헌왕후’ 인 홍 씨를 계비로 간택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후사가 생기지 않자, 헌종은 그것을 이유삼아 그리웠던 그녀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였다.
조선 후기사회, 체제 붕괴 조짐을 보이던 시기에 어린 나이로 즉위된 헌종은 국정을 돌보느라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런 그가 복잡한 정치를 잠시 잊고 낙선재 마루에 앉아서 그녀를 그리며 서화를 보고 글을 썼으리란 상상이 들었다.
이런 기다림으로 그곳을 사랑했던 헌종은 그녀와의 시간을 이곳에서 계속하고자 낙선재 바로 옆에 그녀의 처소로 석복헌을 지은 것이다. 낙선재 왼쪽으로 여인의 한복치마 한 폭이 살짝 닿을 듯한 자그마한 문을 건너면 석복헌이 있다.
석복헌은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작은 문들이 많아 웅장한 느낌을 준다. 작은 방 하나에도 몇 걸음 나아가면 또 문이고 창문이다. 문과 문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고 보일 정도로 작은 문과 창문이 많다. 통 큰 유리로 이루어진 지금의 건축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왜일까? 살짝 보일 듯 말 듯 작은 창들로 그녀를 내보인 이유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헌종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2년뿐 이었다. 그녀가 입궁한지 2년 뒤인 1849년 헌종이 돌연 죽은 것이다. 그때 나이 불과 23세였다.
이후로 그녀는 궁에서 나오게 되었고 77세로 눈을 감는 그날까지 58년이란 긴 세월을 홀로 보냈다. 그 긴긴 시간을 무엇으로 살았을까. 짧았지만 너무나 행복했을 그때를 떠올리며 그리움으로, 때로는 눈물로, 또 때로는 미소로 지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녀가 앉아 자주 바라보았을 것 같은 꽃 계단을 바라보며 나는 중앙 툇마루 끝에 한참을 걸터앉아 있었다. 후원에서부터 창틀을 부딪치고 날아 들어온 바람은 아카시아 꽃 향을 담아서 내게 안겨주었다.
낙선재는 조선의 역사가 멈춘 곳이다. 그리고 많은 기다림의 사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마지막 중전이었던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씨는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홀로 되었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때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춰서 내놓지 않으려 했던 강한 여인이었다. 또 낙선재로 쳐들어 왔던 인민군들을 향해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 이라 호통 치어 내 쫓을 정도로 기개가 있었다.
그녀의 이런 기개가 이후 이승만 정부에게 빼앗겼던 이곳을 끝내 되 찾아 흩어졌던 왕족들을 돌아올 수 있게 했다. 낙선재를 마지막 황실가족을 맞이할 기다림의 장소로 결국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는 심장마비로 71세에 낙선재 석복헌에서 외로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 이은과 그와 정략 결혼한 영왕 비 이방자 여사 그리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까지. 그들은 기구한 운명을 1989년 낙선재 일원에서 마치게 된다.
석복헌 옆 수강재를 지나 작은 후원들을 마음에 담고 다시 돌아와 낙선재 남쪽 정문 앞에 섰다. 정문 위편에는 ‘장락문’이라 쓰여 있다. 흥선대원군 글씨다.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 는 의미이다.
비록 슬픈 사연을 많이 담고 있는 기다림의 장소이기는 하나 기다림이란 어찌 슬프기만 하겠는가. 두근대는 기다림은 분명 즐거움을 주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창덕궁 내 관리자들이 하나 둘 빗장을 걸어 잠그며 내가 오늘의 마지막 관광객이라고 외친다. 낙선재 일원은 장락문이 잠김으로써 그 모습을 닫았다. 나가는 길을 다시 되 돌아보니 장락문 앞에 작은 나무 하나가 수줍게 서 있다. 헌종인가? 아니면 경빈 김씨, 윤비, 아니면 덕혜옹주...그래 그들이 모두 서있는 것 같다. 소슬한 봄바람이 낙선재를 쓰다듬으며 지나간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아픈 역사 (4) | 2024.03.16 |
---|---|
서동요 주인공 선화공주, 정말 무왕의 아내였을까? (1) | 2024.03.01 |
[통영] '문어라면'의 유혹, 살찌는 소리는 들리고 (0) | 2024.01.12 |
아름다운 장사도, 충무김밥의 배신? (2) | 2024.01.05 |
소박해서 더 화려한 작가 박경리 (1) | 2023.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