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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소박해서 더 화려한 작가 박경리

by 사이먼 리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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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쟁취를 위하여 일어섰던 조선민족의 절규가 허사로 끝나고 만 삼일운동은 많은 청년에게 좌절과 허무감을 안겨 주었다. 국제사회의 냉엄하고도 그 비정함에 얼마나 절치부심 하였는가. 민족자결이라는 근사한 간판을 내걸어 놓고도 조선민족의 필사적인 구조신호를 묵살했던 국제사회의 휴머니스트들.]-토지 중-

 

[아무리 교육을 받고 높은 지위에 있다 하여도 비천함은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인성이 나쁘다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이다.]-토지 중-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토지>. 21권 분량 긴 글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밑줄을 칠 수 없어 인상적이고 감명 깊은 부분은 베끼면서 읽었다.

 

<토지>에서 보여 지는 작가 박경리의 안목은 여러 방면으로 탁월하다. 국제 감각, 사회를 꿰뚫어 보는 안목,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미안, 비판적 사고까지. <토지>를 내 인생의 책으로 꼽는 이유다. 통영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이유도, 여름 가족 여행지로 통영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것, 박경리 작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7월 어느날. 내비게이션에 박경리 기념관이라고 입력했다. 잠꾸러기 아들 딸, 신기하게도 출발 예정 시간을 칼 같이 지켰다. 올 겨울 부산 여행을 할 때 까지만 해도 출발 예정 시간을 1시간 가까이 어기던 녀석들이다. ‘반년 새에 어른이 된 것일까!’

 

어떻게 꾸며 놓았을까, 멋진 글귀가 있을 것 같은데...궁금증과 함께 책으로 만난 작가 박경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쿵쾅 거렸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명불허전. 동상에 새겨진 글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가 박경리의 인생을 담은 유고시집 제목이었다.

 

<옛날의 그 집>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실린 ‘옛날의 그 집’ 중에서-

 

그가 버리고 싶었던 게, 아니 버려야 했던 게, 실제로 버린 게 무엇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길 일. 난 어렴풋이 삶 그 자체였다고 느끼지만,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늙어서 편안하다고 말할 정도로 인생을 관조할 경지에 이르면 알게 되려나.

 

기념관에는 작가 박경리 집필실(원주)을 그대로 재현한 방이 있다. 그의 필체를 볼 수 있는 <토지> 친필원고도 있다. 학창시절과 소설가로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의 사진도 전시돼 있다.

 

기념관은 소박하다. 요란하고 화려함을 싫어한 그의 평소 취향 그대로 소박하고 단순하게 건립했다는 게 기념관 측 설명이다.

 

기념관 주변에는 생전에 채소 가꾸기를 좋아한 그의 취미를 그대로 살려 채마밭과 장독대,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그의 묘소도 있는데, 역시 화려함 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곳을 찾은 많은 이들이 메시지를 남겼다. 강석주 통영 시장은 작가로서 위대하셨고 인간으로서 온유하셨던 선생님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는 글을 남겼다. 어떤 이는 “(현재)가진 것을 사랑하는 게 행복이라는 의미 깊은 글을 남겼다.

 

기념관은 소박했지만, 기념관에서 만난 작가 박경리의 일생은 문학가로서 위대하고 화려 했다. 그의 화려함은 소박한 기념관이라 더 빛이 났다. 작가 박경리는 갔지만, 그의 문학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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