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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아픈 역사

by 사이먼 리 202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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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북 군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궁금한 분들에게 '군산근대역사박물관(군산시 해망로)'에 가 볼 것을 권한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역사는 미래가 된다'는 것을 모토로 지난 2011년에 지어졌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다. 1층엔 해양물류 역사를, 2층엔 옥구 농민 항일 항쟁사를 관련 자료와 함께 정리해 놓았다. 3층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군산 거리를 재현해 놓았다.

 

일제 강점기 군산은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던 통로였다. 기름진 호남평야와 바다가 인접해 있어 일본인들이 쌀을 비롯한 곡물 수탈기지로 이용했다. 해서, 그 당시 군산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 일본식 집을 지었고 쌀을 빼돌리기 위해 필요한 도로와 철도역을 건설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그 집과 도로, 철도역이 지금도 군산에 남아있다. 그 당시 건물 11채를 박물관 3층에 재현해 놓기도 했다.

 

예스런 분위기와 커피향이 흐르는 북카페 '미즈'

 

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지난 26일(2015년 3월) 오전. 눈부신 봄 햇살이 낯선 손님을 반겼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습관대로 주변을 빙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박물관이다. 예스러운 정취를 뽐내는 군산세관, 장미 미술관 등. 하나같이 진한 커피향을 부르는 풍경이었다.

 

"부근에 커피숍 있나요?"

"녹색 지붕 보이죠? 그 곳에 '미즈'라는 북카페가 있어요."

 

'눈치 백단이네, 박물관에서 일하다 보면 방문객 마음을 꿰뚫는 혜안이라도 생기는 걸까!' 커피숍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이 바로 내가 찾던 그 곳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예스런 분위기와 커피향이 무뎌진 감성을 자극 하는 곳. 바로 그 곳이었다.

 

커피숍은 박물관을 마주 본 상태에서 오른편에 있는 '장미동'에 있다. 꽃 이름 장미(薔薇)가 아니라 '수탈한 쌀 곳간'이라는 의미의 장미(藏米). 이곳에 카페 미즈와 함께 장미공연장과 장미갤러리, 근대건축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장미공연장은 수탈한 쌀을 보관하던 창고였고 장미갤러리는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었다. 근대건축관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카페 '미즈'는 일제 강점기에 '미즈상사'라는 무역회사 건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입구부터 일본가옥 냄새가 물씬 풍겼다. 2층은 아예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고 다다미방 한쪽 벽에 소설가 채만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맞아! <탁류>. 채만식 초상화 한편에 있는 '탁류(濁流)'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탁류>만큼 군산의 아픔을 잘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몇 년 전, 비련의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너무 갑갑해 가슴을 치며 읽었던 작품이다.

 

가족을 위해 사랑 없는 결혼을 한 주인공 '초봉'의 운명

 

소설 <탁류>의 배경은 1930년대 군산 미두장이다. 미두장은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곡물 거래소를 이르는 말이다. 문제는 이 미두장에서 '미두'라는 투기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비련의 여주인공 초봉의 아버지 정 주사는 군산 미두장에서 투기를 하다가 빈털터리가 돼 하바꾼(밑천 없이 투기하는 사람)으로 전락한 인물이다. 꽃 같은 처녀 초봉이 생활능력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약국에 취직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초봉은 미두에 빠져 은행돈을 몰래 빼내는 부패한 은행원 고태수와 돈 때문에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고태수는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가 들켜서 맞아 죽고 초봉은 악의 화신 같은 곱추 장형보에게 겁탈 당한다. 그 뒤 약국 주인 박제호의 첩이 된다.

 

얼마 후 초봉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결혼 열흘 만에 장형보한테 겁탈당하고 다시 보름 만에 박제호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초봉은 결국 딸을 낳고 만다. 소설은 초봉이 악귀 같은 장형보를 죽이고 살인자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에서 작가 채만식이 보여 주려고 한 건 두 말 할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의 혼란하고 탁한 모습이다. 식민지 경제수탈이란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끝내 살인자가 된 초봉의 삶이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처참한 현실이다.

 

박물관은 탁류에 등장하는 '미곡취인소'를 재현해 놓았다.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쌀을 군산항으로 옮기기 위해 만든 '임피역'도 재현했다. 임피역(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222-127번지)은 지난 20051111일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됐다. 임피역이 있는 임피면은 작가 채만식의 고향이기도 하다.

 

군산 3·5 만세운동은 전북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

 

수탈을 심하게 당한 곳이니만큼 일본에 대한 미움도 컷을 터. 그래서였을까? 군산에서 한강 이남지역 최초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서울에서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4일 만인 35일 교사, 학생, 주민 약 140명이 영명학교에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거리를 행진했다. 만세운동 대열은 순식간에 불어났고 어느 새 군산 전역이 만세운동 불길에 휩싸였다. 이 운동은 35일부터 5월까지 계속됐다. 놀란 일본 경찰은 무자비한 사격을 가했다. 그로인해 53명이 사망했고 72명이 실종됐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운동은 전북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박물관에는 당시 만세운동이 시작 된 영명학교가 재현돼 있다. 아담하고 예쁜 책상과 손때 묻은 손풍금이 낯선 손님들을 반긴다. 영명학교는 3·5만세운동으로 특별과와 고등과가 폐지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1940년까지 운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면서 호남지방 예수교 장로회 소속 학교들과 함께 폐교되고 만다.

 

소작료 인하 요구하는 농민에게 적용된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

 

옥구농민항쟁전시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 항쟁은 일본 지주의 횡포에 맞서 1927년에 일어난 전북 최대 농민항쟁이다. 조선인 소작농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 경찰과 맞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박물관에는 농민항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결과, 역사적인 의미까지 관련 자료와 함께 꼼꼼하게 정리 돼 있다.

 

일본인 지주가 세운 식민농업회사인 이엽사 농장이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자 조선인 소작농들은 45%로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전국 평균 소작료는 46.742.4%였다. 그러나 이엽사는 소작료를 낮춰주기는커녕 오히려 농장에 거주하는 소작인들에게 집을 헐어가라고 협박한다. 소작료를 납부하면 다음해 소작을 많이 주고 집도 지어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한다. 이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한다. 그러자 일본경찰은 농민 지도자 장태성을 검거한다.

 

이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 명이 주재소를 습격해서 지도자를 구출한다. 하지만 지도자 30여 명이 다시 붙잡힌다. 다음날부터 군산경찰서 앞에서 200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잡혀간 지도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소방대까지 동원해 물을 뿌리며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결국 34명이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농민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국가보안법의 전신인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치안유지법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사상 통제를 가해 조선의 사회주의운동 등을 억압하는 데 이용됐다. 그 법을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농민들에게 무리하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국가보안법 전신이 치안유지법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설립 모토인 '역사는 미래가 된다'는 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실제 사례다. 치안유지법 역시 지금의 국가보안법처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으니 말이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국민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옥구농민항쟁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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