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다가서자 양들은 무리 속으로 파고 들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래봐야 1톤 화물차 적재함이니, 양들이 숨을 곳은 애초부터 없었다. 사내의 억센 손에 붙잡힌 양 한마리. 체념한 듯 ‘음~메에’ 하고는 발버둥치기를 그만두고 눈만 끔벅거렸다.
사내의 가족으로 보이는 서른대여섯 정도 됨직한 여자가 양의 얼굴을 감싸고는 주문을 걸듯 무어라 속삭였다. 아마도 ‘미안해, 좋은 곳으로 가, 겁먹지 말고, 누구나 한번은 죽는 거잖아’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여자의 소박한 이별 의식이 끝나자 사내는 양을 풀밭에 눕혔다. 양의 눈길은 유난히 짙푸른 몽골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물기는 없었지만 분명 죽음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내가 어째서 저 모습을 보자고 한 것일까’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전 세계를 포위하기 전 한여름, 러시아 국경 근처 몽골 홉스콜 호수 부근에서 맞닥뜨린 광경이다.
‘이곳 사람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양을 잡는다’는 가이드 말을 듣고는, 일행 중 하나가 ‘직접 보자’고 했다. 나를 비롯한 일행 대부분이 찬성하자 현지인 가이드는 목장 주인과 흥정을 시작했고, 흥정이 끝나자 그 일은 곧바로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사내가 사과나 깎을 것 같은 작은 칼로 양의 배를 두어 번 긁자, 배에 작은 틈이 생겼다. 상처가 아닌 틈이라 한 것은, 피가 한방울도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도 그리 아파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우악스런 손이 그 틈을 비집으며 양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양의 얼굴에서 고통이 보인 것은 이때부터다. 양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아픔을 참고 있었다. 그래도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음~메에’뿐이었다.
사내가 크고 투박한 손으로 양의 얼굴을 두어 번 쓰다듬은 뒤, 그 손으로 양의 눈을 덮었다. 세상과 영원히 이별하는 순간의 두려움을 덜어 주려는 행동으로 보였다. 2분 남짓, 양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양의 몸속을 파고든 사내의 손이 심장 어딘가 중요한 혈맥을 눌러 양을 잠재운 것이다.
양의 영혼이 육체를 떠난 뒤, 명복을 빌어 주는 듯한 엄숙한 침묵이 한동안 주위를 감쌌다.
‘으앙’ 하는 울음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깼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5살 정도 돼 보이는 볼 빨간 여자아이가 풀밭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었다.
아빠로 보이는 한 사내가 씩 웃으면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 달래려고, 아이를 양과 멀리 떨어뜨리려 그러는 줄 알았는데, 사내는 오히려 양에게로 아이를 데려갔다. 양과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울음소리는 시나브로 커졌다. 손만 뻗치면 양을 만질 수 있는 거리에 다다르자 아이는 발악을 하듯 울어댔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도 웃음이 흘렀다.
데자뷰인가. 어쩐지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디서인가 분명 봤었는데...그렇다, 그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대여섯 살 정도 된 사내아이가 마루 위에 서서 훌쩍이고 있었다. 흐느낌에 가까운 울음이었지만,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큰 슬픔을 겪은 게 분명했다. 아이의 시선이 머문 곳은 토방 아래 샘가. 목이 비틀린 수탉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몸짓이었다.
닭 목이 비틀린 샘가 옆 노천 아궁이 위에는 큰 가마솥이 걸려 있었고, 가마솥 안에서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며 수탉은 털이 뽑혔고 배가 갈린 뒤 내장을 쏟아냈다. 목도 잘렸다. 그때까지 아이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이에게 관심을 둔 어른은 내 기억에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 모습을 유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도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일이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어느 날 “하지 마, 라고 중얼거리며 네가 울었지”라고 말할 때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난 소스라칠 만큼 놀랐다. 오롯이 나만 알고 있는, 기억 속에 꽁꽁 묻어둔 일이라 여겼는데. 그 오랜 착각이 깨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닭 목이 비틀리는 충격을 경험한 뒤 난 아주 오랜 기간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특히 닭고기는 절대 먹지 않았다. 처음에는 닭이나 돼지한테 미안해서 먹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몸이 거부해서 먹지 못했다. 고깃국이라도 밥상에 올라오면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어야 할 나이에 이렇듯 음식을 가렸으니. 내 어린 시절이 병치레의 연속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볼에는 늘 마른버짐이 폈고 환절기만 되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잘 자라지도 않아 키도 또래보다 작았다.
채식주의가 깨진 것은 중학생이 되어 성징이 나타날 즈음, 그러니까 자고 일어나면 키가 쑥쑥 자라는 ‘2차 급성장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어쩐 일인지 고깃국이 밥상에 올라와도, 심지어 그 고기를 먹어도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차원 높은 깨달음을 얻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몸이 받아들인 것이고, 내 의식이 거부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시작된 육식은 수십 년 이어졌고, 홍안의 소년은 건장한 청년을 거쳐 어느덧 백발 휘날리는 중년이 됐다.
내가 그랬듯, 볼 빨간 몽골 여자아이 역시 ‘분리의 아픔’이라는 성장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이제 양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더이상 친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오는 그런 아픔이다. 친구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약병아리 적부터 품에 안고 살았으니, 목이 비틀린 그 수탉은 분명 어린 나와는 영혼을 교감한 ‘절친’이었다. 그런 친구 목이, 내게는 그렇게도 다정한 아버지 손에 비틀리는 참담한 광경을 다섯 살 꼬마가 목격한 것이다. 내심 말려주기를 기대한 믿었던 어머니마저 털을 뽑고 내장을 들어내며 ‘친구 살해’에 적극 동조를 했으니, 그 배신감과 실망, 분함이 어떠했겠는가.
그 순간 다섯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럽게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 뒤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친구에 대한 의리 지킴과 동시에 부모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이었다.
몽골 소녀도 나처럼 고기 먹는 것을 거부할까? 생각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몽골에는 고기 말고는 딱히 먹을 게 없었다. 그나마 난 주식이 쌀인 나라에 태어난 덕에 ‘채식’이라는 저항을 할 수 있었지만, 주식이 고기인 그 소녀에게는 그런 피난처가 없을 것이리라.
알고 보니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양을 잡는 것은 그들 나름의 생존 방법이었다. 멋을 부린 것도 아니고, 도축 기술을 자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초원에서 피 냄새를 풍기면 늑대 같은 포식자가 달려드니까, 그걸 피하려고 피 없이 도축을 한 것이다.
살기 위해 영혼이 있는 생명의 껍질을 벗겨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어쩌겠는가. 그걸 알기에 내 어머니, 그리고 몽골 소녀의 부모 역시 아이가 아무리 악을 쓰고 울어대도 달래 주지 않은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희생된 영혼이 얼마나 될까.’
몽골에서 본 양의 눈이 떠오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뒤를 잇는 것은 ‘그 많은 영혼을 희생시키면서 이어가는 내 삶, 그만큼의 값어치가 정말 있는 것일까’인데, 끝내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럴 때마다 그 영혼들에게 감사하며 그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답을 대신하고 만다.
정말 큰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할 정말 어려운 숙제인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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