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먼발치에 보일 즈음 K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치료를 마치고 정문 근처에 나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치료받으면 거의 초주검이라는데, 서 있을 수나 있는 것일까’. 마음이 바빠졌다.
급하게 핸들을 꺾어 병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남녀. ‘K인가.’ 마스크를 하고 있어 확신할 수 없었다. 확인하기 위해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자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다행이다.
그와, 그리고 동행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내 차 뒷좌석에 앉았다. 반가움과 서먹함이 교차하는 미묘한 분위기가 차 안을 감돌았다.
겨우 8년 정도의 헤어짐인데, 난 그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미안했다. 마스크는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 때문에 나 역시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한눈에 나를 알아보고 이름까지 불러 주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쳐진 눈꼬리, 머리카락이 검지 않았다면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만큼 K의 외모는 많이 변해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쉑쉑’ 쇳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기력도 쇠약해진 게 분명했다.
세월처럼 정직하고 잔인한 게 또 있을까. 동행은, 갓 스무 살이 넘은 그의 딸이었다. 8년이란 시간이 초등학생 딸을 스무 살 청춘으로 만든 대신, 그의 아비를 병들고 초췌한 중늙은이로 만든 것이다.
K와 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해 왔다. 그러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닌데, 삶의 전환기마다 그와 난 길이 엇갈렸다.
그는 내 기억 속에 있는 첫 또래 친구다. 밭둑길을 50m정도 걸으면 그의 집이 나왔다. 초가집에 사립문인 우리 집에 비하면 그의 집은 대궐이었다. 최신식 슬레이트 지붕에 벽돌담. 우리 집 보다 두 배 이상 컸다. 할아버지가 목수여서 흙벽돌 틀, 대패, 흙손...그의 집에는 신기한 놀잇감이 참 많았다.
난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집 대문 앞에서 “친구야 놀자”를 외쳤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와 반갑게 나를 맞았다. 그가 우리 집 사립문 앞에서 "친구야 놀자"라고 외치면, 나 또한 밥숟가락 내팽개치고 달려 나갔다. 그의 집 굴뚝 옆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흙벽돌 만들기, 집단 쌓기...우리들의 놀이는 "밥 먹자"라는 엄마 외침이 밭둑길을 가로지를 때까지 계속됐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와 난 헤어짐을 경험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집이 지척인데도 학교가 엇갈렸다. 그래도 우리 집이 언덕 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사하기 전인 2학년 때까지는 종종 만날 수 있었다. 이사한 뒤로는 생활권이 바뀌어 통 만날 수가 없었다. K와 떨어지기 싫어 이사하지 않겠다고 생떼를 쓰다가 아버지한테 호되게 지청구를 먹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4년이 흐른 뒤,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은 덕에 K와 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등하교는 물론이고, 우린 참 어지간히 붙어 다녔다. 성장이 빨라 K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컸다. 성격도 담대해, 그와 함께 있으면 늘 든든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린 또 엇갈렸다. 나는 멀리, 그는 집과 가까운 학교에 다니게 됐다. 아버지 뜻을 못 꺾어 내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우린 얼굴 보기도 힘든 처지가 됐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를 때마다 K는 읍내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곤 했다.
대학의 갈림길에서 우린 또 갈라졌다. 그 뒤로는 사는 곳도 서로 멀어 전화나 가끔 하는 사이로 10년 가까이 지내다 결혼할 나이가 돼서야 ‘동창모임’ 같은 데서 만날 수 있었다. K와 나는 서로의 결혼식에서 신랑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 모습은 결혼 기념사진에 담겼다.
서른다섯 살 무렵, K가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작은 사업체를 운영 하면서 일 년에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생겼다. 추석, 설, 여름휴가···. 나이가 엇비슷한 그와 내 아이가 소꿉장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 손에 지폐 한 장 쥐어주는 재미,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참 솔솔 했다. 아무 때나 불쑥 찾아도 반겨주는 친구가 고향에 있다는 게 그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났다. K의 사업이 기울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얼마 안 돼 그와의 연락이 끊겼다.
“그동안 잘 있었어, 나 K.”
“너 K 맞아? 목소리가 왜 그래?”
8년여 만에 온 전화였다. 진기가 다 빠져 갈라지고 쉰 노인의 음성이었다. 대장암 중증이라고, 며칠 전 수술을 받았다고, 의술이 좋아져서 그런지 항암치료가 그리 힘겹지는 않다고 그는 남 일처럼 이야기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어쩌면 K를 다시 못 볼 것 같아 며칠 뒤 회사에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항암치료를 마친 직후인데, 생각보다 그는 건강했다. K는 묻기도 전에 “수술이 아주 잘 됐고, 어쩐 일인지 항암치료를 하는데도 머리카락도 안 빠지고, 후유증이 거의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사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그는 “3시간도 더 걸릴 텐데” 하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막노동도 하고, 고물 장사도 했어. 큰 애는 기숙사로 보내고, 둘째는 단칸 셋방에 데리고 살았지. 다행히 사업이 잘 풀려 몇 년 전에 집도 장만했어. 큰 애는 백화점에 취직했고, 둘째는 고등학교 마친 뒤 나와 함께 일했고. 이제 좀 살만하다 했는데···.”
그가 사는 곳까지 4시간 가까이 걸렸다. 많이 외로웠는지, K는 쉴 새 없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둘째 잘 키워서 병간호 받고 있으니, 너 복 받은 거야.”
추임새를 넣듯 말하자 그는 쿡 웃고는 “나 때문에 이 애가 고생이 많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느라 며칠을 비운 탓에, 그의 작은 아파트에는 한기가 감돌았다. 한기 가득한 집에 그를 두고 돌아오는 길. 구부정한 허리에 쳐진 눈꼬리, 쇳소리 섞인 그의 기력 없는 목소리가 신발 뒤축에 따라붙어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친구야 놀자'라는 외침이 내 몸 어딘가에 가라 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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