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무서워요, 혹시 떨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나중엔 홀딱 빠져서 헤어날 수가 없게 되지요. 정말 매력 있는 스포츠예요. 말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얼굴 익히고 나면 얘들(말)이 장난도 걸어요."
우리를 제주도로 이끈 정열씨의 '승마예찬'이다. 이 얘기를 듣고 승마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주도까지 날아간 마당에 승마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여행자의 도리가 아니라 판단했다. 여행 마지막 날 오전 10시께,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S승마장에 도착했다.
이게 진짜 제주도 겨울 날씨인가! 햇살이 강해 눈이 부셨다. 얼었던 땅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승마하기에 딱 좋은 날씨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같은 장소인데도 어제와는 사뭇 다른 날씨였다.
전날 오전 11시께에도 우린 이곳에 왔었다. 제주 날씨는 변덕스럽다더니,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싸라기 같은 눈발이 날렸다. 날씨도 스산한데 누군가 말 옆에 누워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까지 목격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말을 타다가 떨어져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다쳤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마침 대기하는 사람도 많아 좋은 핑계거리도 생겼다 싶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탈 만한 날씨가 아니라고 말하고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날, 우리가 다시 승마장을 찾은 것은 정열씨의 '승마예찬' 덕분이다. '승마예찬'이 없었다면 우린 아마 이번 제주 겨울여행에서 '승마'를 빼 버렸을지도 모른다.
서광 승마장에 있는 말은 '제주마'와 '한라마'였다. '제주마'는 우리에게 조랑말로 익히 알려진 말이고 '한라마'는 제주마와 경주마 '더러브렛'이라는 종을 교배해서 탄생시킨 일종의 잡종마다.
제주마는 잘 알려진 대로 체구(암컷 117㎝, 수컷 115㎝)가 작다. 키가 작아서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의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한다. 그에 비해 한라마는 키가 130~150cm 정도로, 제주마보다 큰 편이다.
조랑말이라는 명칭은 상하의 진동 없이 아주 매끄럽게 달리는 주법을 의미하는 조로모리(몽골어)에서 유래했다. 상하 진동 없이 달리는 주법 때문에 조랑말이 군마로 각광을 받으며 전쟁터를 누볐다고 한다. 상하진동이 없어 말 위에서 중심을 잡고 활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기에 적당했던 것.
제주에서 말을 키우기 시작한 건 잘 알려진 대로 고려시대 부터다. 삼별초를 정벌한 몽골군(몽골 고려 연합군)이 제주에 마장을 세우고 몽고마를 키우게 되는데, 이게 조랑말의 선조다. 이 때 몽골은 일본 정벌을 위해 말을 키울 마장이 필요했는데, 나무 대신 풀이 좍 깔린 제주도의 완만한 구릉지형이 말 키우기에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승마예찬' 에 다음 날 다시 승마장으로
"아~어제 그분요? 말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간질이에요. 간질을 앓고 있던 분인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던 거예요. 관광승마 하는데, 떨어질 일이 있겠어요? 교관이 고삐를 붙잡고 있는데."
이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됐다. 알고 보니 말에서 떨어진 게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을 푹 놓을 수 없는 건, 우리가 하려는 게 관광승마가 아닌 승마교습이기 때문이다. 관광승마는 교관이 말고삐를 붙잡아 주지만 승마교습은 스스로 말을 몰아야 한다.
"애마부인 두 분만 잘하고, 나머지는 모두 빳빳하게 굳어 있습니다. 몸에 힘 좀 빼세요. 말 움직임에 몸을 맡기세요."
어떤 스포츠든 몸에 힘을 빼야 잘 되는 법, 승마도 다르지 않았다. 힘을 빼란다. 근데 그게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잘 안 되니까 초보자지. 교관이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어쩐지 몸이 더 경직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교관 입담이 점점 더 화려해졌다.
"여자분들이 참 잘해요. 처음엔 무섭다며 떨고 그러다가 막상 한 번 타고 나면 푹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남자들은 그 반대고요. 용감한 척 하다가 막상 (말 위에) 올라가면 더 긴장해요. 그래서 승마는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스포츠입니다. 애마부인은 있지만 애마남편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아주 잘 하고 있다는, 말 움직임에 몸을 잘 맡기고 있다는 애마부인은 내 아내인 최 여사와 이번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K씨의 부인이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어 어색해 보이는 것은 나와 K씨, 그리고 J씨의 중학생 아들 혜빈이와 딸 희라, 나의 2세 15살 하영이다. J씨와 그의 부인은 말과 친하지 않다며 승마를 포기했다.
어쩐 일인지 하영이가 탄 말은 통 움직이지를 않았다. '말도 잔등이에 탄 사람을 닮아가나'(하영이는 달리기를 무척 싫어한다) 하고 생각 할 즈음 "어이 학생 뒤꿈치로 배를 한 번 차" 하고 교관이 소리쳤다. 교관의 고함 소리를 듣고도 소심한 하영이는 겁을 먹었는지 말의 배를 차지 못했다.
"어이 학생, 겁먹지 마. 사실은 말이 더 무서워, 말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 더 무서운 거야. 생각해 봐. 낯선 사람이 잔등이에 타고 있으면 무섭지 않겠어? 그러니 겁먹지 말고 힘껏 차, 그 말이 제일 순한 말이야."
그제야 하영이는 말의 배를 힘껏 찼다. 그러자 '숏다리' 조랑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했는지 하영이 뒷모습이 경직돼 보였다. 내 뒷 모습도 저럴 것이라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내가 탄 말은 제주마보다 키가 큰 한라마였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킁킁 소리를 내며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혹시 내가 무거워서, 기분이 나쁘다는 표시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옆에 있는 교관한테 "얘, 왜 이래요? 혹시 내가 무거워서 그런가요?" 하고 물었다.
"아마 그 이유도 있는 것 같고요, 그 보다는 얘가 기수를 깔보는 것 같아요. 얘들도 등에 탄 사람하고 기 싸움을 하거든요. 기수가 잘 못하는 것 같으면 만만하게 봐요. 그럴 때 킁킁 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잘 안 들어요. 제 멋대로 풀 뜯어 먹으러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고."
'이런 젠장! 말한테 무시당하다니, 그렇다고 욕을 해 줄 수도 없고.' 또 한 번 헛웃음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승마교습 팀이 진땀을 빼고 있을 즈음, 관광승마를 하고 있는 여덟 살 아들 호연이와 K씨 아들 일곱 살 은환이 다섯 살 딸 은민이는 신이 나 있었다. 말 위에서 깔깔 대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재미가 붙은 모양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세 녀석이 교관아저씨에게 더 태워 달라고 생떼를 써서 약 700M 트랙을 여섯 바퀴나 돌았다고 한다. (규정대로 하면 두 바퀴.)
긴장이 풀리고 말 움직임에 맞춰 제법 몸을 흔들 여유가 생길 즈음 승마 교습이 끝났다. 아쉬움 반 후련함 반. 말 잔등이에서 내려오며 '휴~ 이제 끝났구나, 이대로 몇 시간만 더 하면 잘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몇 번 교차했다.
이렇듯 아쉬움은 남지만, 기수 노릇 제대로 못해 말한테 무시당하기는 했지만, 2박3일 제주 여행의 백미를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승마를 지목할 것이다. 만약 다시 제주도를 찾는다면 그 이유 역시 '말' 이 아닐까! 다리 짧고 몸 통통하고 얼굴 큰, 그리고 아주 순하고 친절해 우리나라 사람과 꼭 닮은 조랑말(제주마)이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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