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바다를 가르며 빠르게 북쪽으로 내달았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일까. 식당에서 일하는 필리핀 선원 제임스 님로도(james nimrod)에게 물으니 “내 생각에는 북한 바다 어디쯤일 것 같다(I think it's somewhere in North Korea.)”라고 대답한다. 선원 중 3분의 1정도가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의 대답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 동해항에서 출발한지 4시간여가 지났으니, 북한 바다 어디쯤인가를 지나고 있을 것 같았다.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배 ‘DBS크루즈 훼리’를 탄 것은 지난 4월 21일(2019년) 오후 2시. 길이가 100m나 되는 큰 배라 그런지 출발을 했는데도 선실에서는 전혀 움직임을 느낄 수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배가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는 힘차게 동해항 물살을 가르며 포말을 만들어 냈다. 높이 1m나 되는 파도가 잔물결처럼 잔잔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동해항인근 건물이 모두 시야에서 떠났다. 내 곁에 남은 건 바다와 배 뿐이었다. 아~ 하늘도 있었지. 갈매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망망대해에 들어서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wi-fi가 끊겼다. 내 휴대폰은 더 이상 전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 아니었다. 엄청난 기능을 자랑하는 슈퍼컴퓨터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일정이나 확인하는, 간단한 메모나 할 수 있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불편했냐고? 당연히 불편했다. 그러나 그것은 초콜릿처럼 달콤한 불편함이었다. 일상의 끈 같은 휴대폰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찾아온 완벽한 휴식. 난 그 휴식을 마음껏 즐겼다. 멍 때리기, 눈감고 가만히 앉아 있기, 머릿속 텅텅 비우고 음악만 듣기, 낮술에 벌개진 얼굴로 돌아다니기...이런 휴식을 즐기지 못할 이유가, 그 바다에는 없었다.
오후 7시 즈음이 되자 어둠이 바다를 감싸 안았다. 이제 더 이상 바다는 빛을 반사하지 못했다. 배가 우주를 떠다니고 있다는 상상이 일면서, 정신이 아뜩해 졌다. 말로만 듣던, 책에서만 읽었던 밤바다는 이렇게 황홀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커다랗고 둥근 달이 어둠 속에서 솟아올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도 몇 개 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서 있는 곳이 은하계가 아닌 지구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밤바다의 황홀함에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제각기 분주했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 외국인은 무슨 볼일이 그리 많은지 수시로 선실 앞 로비를 휘돌아 치듯 돌아 다녔다. 어떤 이는 저녁을 먹자마자 ‘치맥’을 하는 믿기지 않는 ‘위대(胃大)’함을 과시했다. 고스톱에 열중인 어르신들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야~ 자뻑이다. 어~쌌네! 흔들고 났으니 이게 도대체 몇 점이야~”
wi-fi가 끊기면서 찾아온 완벽한 휴식
선상에서의 첫 밤은 이렇게 깊어갔다. 10시도 안된 시각에 일찌감치 누웠지만 잠이 쉬 찾아오지 않았다. 수면제로 쓸 맥주가 필요했다. 3캔(1000cc정도)을 들이키고 나서야 배 엔진소리와 진동, 흔들림 그리고 후덥지근함을 떨치고 잠속에 빠질 수 있었다.
눈을 떠보니 밖은 아직도 어둠속 세상이었다. 옅은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너무 많이 마셨나? 일상 속에 있었다면 출근을 위해 숙취를 털어낼 방법을 찾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난 여행자였다. 배 안에 갇혀 있다시피 해서 대화 상대조차 찾기 어려운 그런 여행자였다. 할 일이라고는 먹고 생각하고,...무엇을 해야 할지가 가장 고민스러운 무료하리만치 한가한 여행자였다.
‘잠간 눈 붙였다가 일어나서 해 뜨는 모습을 봐야지’하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바다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해가 바다를 뚫고 솟아오르는 장관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내일은 볼 수 있으려나? 러시아 시간이 우리나라보다 1시간 이르니, 해 뜨는 모습을 보려면 우리나라 시간으로 최소한 5시에는 눈을 떠야 한다.
촬영에는 응했지만 얼굴만은 공개 못하겠다고
늦잠대장 중학생 아들 녀석을 깨울 걱정, 일상이 다이어트인 대학생 딸 건강 걱정을 잠시 내려놓은 특별한 아침이 내게 찾아왔다. 잔잔한 바다와 수평선이 아흔을 훌쩍 넘긴 치매기 있는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도 잊게 했다.
선상 카페 ‘jesta bar’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진한 향을 풍기는 커피 한잔과 함께였다. 따스한 햇살 한 자락이 커튼을 뚫고 들어와 손등을 간지럽혔다. 스피커를 타고 울리는 피아노 선율이 카페 분위기를 더욱 고즈넉하게 했다.
책장을 넘기는 나이 지긋한 여성의 모습이 창밖으로 보이는 잔잔한 바다만큼이나 평온해 보였다. 그는 스위스 여행자였다. ‘당신이 책 읽는 모습을 내 카메라에 담고 싶다(I want to take a picture of you reading a book on my camera.)’고 하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카페에 내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눈을 감았다. 10분 20분...내 몸을 괴롭히던 만성적인 두통과 뒷목 뻐근함이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더 눈을 감고 있다가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 것만 같아 눈을 떴다.
깨지기 일보직전인 커플이 이 카페 창가에서 서로를 바라본다면 분명 사랑이 다시 불타오르리라.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 카페가 문득문득 그리워질 것이다.
갑자기 바뀐 일정, 혹시 북-러 정상회담 때문?
오전 10시가 되자 정말로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필리핀 선원 제임스가 “너는 내일 오전 10시에 많은 섬을 볼 수 있을 것이다(you will can see many island at AM 10)”라고 말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섬들이 러시아 영해에 들어섰다는 증표였다. 드디어 우리가 탄 배가 북한 영해를 지나 러시아 영해로 들어선 것이다. 크고 작은 섬, 나무가 있어 파랗게 보이는 섬과 민둥산처럼 바위로만 이루어진 섬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오 즈음에 아주 먼발치에서 크고 작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라디보스톡이다. 이미 배 엔진은 꺼져 있었다. 그동안의 속도를 동력으로 물위를 미끄러지듯 천천히 블라디보스톡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배는 항구에 닿지 못하고 항구 목전에서 닻을 내렸다. 한국인 선원에게 이유를 물으니 “멈춰선 배 안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내일 아침에나 블라디보스톡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일정이 갑자기 바뀐 것이다.
만족할 수 없는 답변이라 재차 이유를 물으니 “굉장히 큰 배가 우리보다 먼저 항구에 들어와서 블라디보스톡 항 관계자가 우리 배 입항을 갑자기 거절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째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정말요? 우리 직원이 모든 여행객과 전화 통화를 한 걸로 아는데요”라며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설명이 충분치 않았는지, 일정이 갑자기 바뀐 이유에 대한 갖가지 추측이 여행객들 사이에 나돌았다. 그 중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방문 일정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24~26일 즈음 북-러 정상회담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실제로 며칠 뒤인 24일 오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여행객들은 정말 한가한 하루를 바다 위에서 보내야 했다. 고스톱을 치던 어르신들은 선실 앞 로비 탁자에 다시 보자기를 깔았다. 일행과 갑판 위에서 이야기꽃을 피운 이들도 있었다. 갖가지 표정과 포즈를 지으며 ‘셀카 삼매경’에 빠진 이도 있다. 난 햇살 따뜻한 갑판 위에서 꽤 오랜 시간 광합성을 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한 한국인 여자 선원에게 ‘한 달에 며칠을 배 위에서 보내느냐’고 물었다. 그는 “3주일을 배위에서 일하고 1주일은 육지에서 휴가를 즐긴다”라고 말했다. ‘그 일주일이 정말 소중 하겠다’라고 말하자 그는 대답대신 웃음을 보였다.
어둠살이 밀려오자 블라디보스톡 하늘에 옅은 노을이 깔렸다. 구름만 없었다면 꽤나 붉었을 노을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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