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최저 기온 영하 6℃, 12월 어느 날 날씨다. 지붕 위는 눈꽃 세상이다. 새벽 공기를 마시려 집을 나서니 입에서 뜨거운 김이 나온다. 두꺼운 양말을 신고 손에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과 발이 시리다.
'반 팔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 시간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그렇다고, 그 무더웠던 여름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니다. 불과 한 달 전, 난 중국 복건성(푸젠성) 무이산(우이산)에서 반 팔 차림으로 산과 들 그리고 거리를 누볐다. 날씨가 느닷없이 추워지니 무이산의 따뜻한 공기와 함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그리워진다.
온주(원저우) 공항(저장성)에 도작한 것은 지난달 11일, 한국시간으로 오후 12시 5분께다. 1시간 시차가 나는 중국시간으로는 오후 1시 5분. 5시간을 달려야 목적지인 무이산에 도착한다기에 버스에 오르자마자 눈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어둠살이 내려 있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공항으로 향한 터라 몹시 피곤했다.
버스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도착했나 싶어 중국 국적 동포 가이드에게 물으니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며, 휴게실이 있으니 잠시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뉘앙스가, 의무적으로 쉬어야 하는 것 같아 "꼭 쉬어야 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 버스 운행 규칙"이라고 답하며 "시속 100km 이상 달려도 안 되고 일정 거리를 달리고 나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버스 안에서의 수면이 더 달콤했다. 적어도 과속이나 긴 시간 운전으로 인한 피로가 원인이 돼 사고가 날 일은 없을 것이란 '마음 놓임' 덕분이었다.
나중에 여행사 등을 통해 알아 보니 실제로 관광버스가 고속도로에서 제한속도인 100km/h를 위반하면 10%에서 20% 초과 시 과태료를 150위안이나 물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0000원 정도. 20%에서 50% 초과하면 200위안(한국 돈 4만 원), 50%에서 70%를 초과하면 1000위안(한국돈 20만 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또한 관광버스는 고속도로 위에서 2시간 이상은 달릴 수 없다. 2시간을 달리면 10분 이상은 무조건 쉬어야 한다. 이 규정을 위반해도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친 절 '감로암사'
무이산에 발을 들인 것은 중국 땅을 밟은 지 사흘째인 지난달 14일이다.
그 전날인 13일에는 무이산에서 버스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태녕(타이닝)을 둘러봤다. 태녕은 지질공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화산암, 화강암 구조의 지형을 두루 갖춘 지질공원으로 기암괴석, 협곡, 동굴, 호수 등이 서로 어우러진 풍경이 특이하면서 아름답다. 색이 붉은 사암(砂岩)이 풍화와 침식을 거치며 형성된 기이한 단하 지형이 특징이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됐다.
인공호수 대금호에서 4시간 코스 유람선을 타고 다니며 등산과 하산을 반복했는데, 동굴 속에 지어진 붉은 절 '감로암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저 아찔한 곳에 어떻게 절을 지을 수 있었을까.'
감로암사는 878년 전인 1146년에 짓기 시작했는데 당시 기둥 하나를 땅에 박고 그 위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기와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움푹 파인 바위 틈새에 건물이 있어 비가 와도 젖지 않기 때문이다. 지붕은 나무를 'T'자 형태로 끼워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건물을 지탱하는 큰 기둥은 맨질맨질했는데, 기둥을 안고 소원을 빌면 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어서였다. 그날 역시 수많은 사람이 기둥을 끌어안았는데, 미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전설을 믿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지금 안아보지 않으면 그럴 기회가 없을 것같아서 그런 것뿐이다. '내가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대나무 뗏목 타고 협곡과 계곡 유람
무이산은 주자가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또 풍광이 수려한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인이 평생 한 번은 찾고 싶다고 할 정도의 명소이고 중국 10대 명차 중 하나인 '대홍포' 산지로도 유명하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 복합(자연+문화)유산에 등록됐다.
무이산은 또한 대나무로도 유명하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차보다는 대나무였다. 전날 둘러본 태녕 또한 대나무가 지천이었다. 혹시나 해서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는 판다가 이곳에서 있느냐"고 가이드에게 물으니 "아쉽게도 그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도로 펜스, 주방용품... 대나무의 용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뗏목도 만들었는데, 무척 튼튼하고 물에도 잘 떴다. 한국 돈으로 150만 원 정도 했는데, 한 대 사서 집 근처 호수에 띄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 뗏목은 유명한 관광상품이었다. 태녕에서는 대나무 뗏목을 타고 협곡을 항해(?)했고, 무이산에서는 계곡을 유람했다.
무이산 뗏목을 타면 구곡계(9개 계곡)와 36개의 산봉우리, 99개의 암석을 감상할 수 있다. 봉우리마다 대왕봉, 옥녀봉 등의 이름이 있고 이야기(전설)도 있다. 옥황상제 딸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을 만났다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옥녀봉이 됐다는 식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무이구곡의 6곡에 속하는 해발 409m의 천유봉은 484개의 계단을 올라야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꼭 올라야 하는 곳이라 강조하던 친구 녀석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경험자가 주저앉으면 어떻게 해?"라고 하자 "몸무게 100kg을 넘어 보면 내 심정 알거야, 너무 어려워"라며 널찍한 바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올라 본 이의 행동이라 엄살은 아닐 것 같아 슬쩍 겁이 났지만, 그래도 오르기로 했다. 숨이 차 오르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는 수월한 산행이었다.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흔들바위나 서울 신림동과 경기도 과천, 안양에 접한 관악산 국기봉 정도를 올랐던 사람이라면 쉽게 오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정상에 오르면 무이산 구곡계(9개의 계곡)를 내려다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장관'이다.
대홍포에 대한 자부심이 녹아 있는 장예모 감독의 공연
무이산하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게 '차(茶)'다. 특히 무이산 암벽에서 나는 대홍포가 유명하다. 빨간 망토를 두른 차라는 의미인 대홍포 모수는 중국 정부에서 특별 관리한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벼랑에서 자라, 원숭이를 훈련시켜 찻잎을 따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이 찻잎을 볶아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전설도 있다.
또한 대홍포는 지난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에게 모택동(마오쩌둥)이 선물한 차로도 유명하다. 당시 모택동이 닉슨에게 모수에서 딴 대홍포 200g을 선물하자, 닉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적다는 표정이었다. 이를 눈치챈 주은래(저우언라이)가 헨리 키신저에게 "대홍포는 1년에 400g만 생산되는 귀한 차로, 200g이면 중국의 절반을 준 것"이라고 설명하자, 이를 전해 들은 닉슨 표정이 밝아졌다고 한다.
모수는 글자 그대로 어머니 나무라는 뜻이다. 무이산에는 6그루의 대홍포 모수가 있다. 벼랑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나무 한 그루마다 안전대가 설치돼 있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06년부터 모수에서 대홍포 채집하는 것을 금지해 모수에서 딴 찻잎으로 우린 차를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하는 대홍포는 무성 번식을 통해 생산한 것이다.
대홍포에 대한 자부심은 장예모 감독이 만든 '인상대홍포(印象大红袍)'라는 공연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3000석의 객석이 360도로 회전하며 약 70분의 공연을 한다는 게 특징이다. 무이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수백 명의 배우가 출연해 대홍포의 역사와 채집·제작 방법을 설명하고, 차 문화를 소개한다. 공연 말미에 배우들이 객석을 뛰어다니면 관객들에게 직접 차를 나누어 준다.
내 가방에 총이 있다고?
돌아올 곳이 있어야 여행이라고 했던가.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집이 그리워질 즈음 온주 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해 난 진땀을 빼야 했다. 공항 직원은 내 백팩을 몇 번이고 검색대에 집어넣으면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러다가 도저히 찾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검색대에서 촬영된 화면을 보여 주었는데, 무엇인가 끝이 뾰족한 물건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 또한 알 수가 없었다.
"총열".
공항 검색대 직원이 번역기를 돌려 휴대폰에 찍어준 한국 글자다. '맙소사, 내 가방에 총 부품인 총열이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의 눈에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테러리스트를 잡았다는 눈빛이었다.
이 글을 본 뒤로 내 마음이 다급해졌다. '혹시 누군가 내 가방에 나 몰래 총 부품을 넣은 게 아닐까...' 절망적인 상상이 머리를 스치며 TV에서 본 중국 감옥이 눈에 어른거렸다.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모두 꺼내 보았지만 나 역시 화면 속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물건. '아~지퍼 손잡이'. 정말 그 물건이었다. 가방 지퍼 손잡이에 달린 총알 모양 액세서리. 그 액세서리를 찾아 보여 주자 공항 직원은 잽싸게 떼어냈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는 총알 모양 액세서리를 총알이 아닌 '총열'이라 번역해서 내게 보여 준 것이다.
"it's just an accessory(그냥 액세서리)"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규정상 기내에 반입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난 그 예쁜 액세서리를 압수당하고서야 검색대를 통과 할 수 있었다.
참으로 언짢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 가방을 들고 그동안 한국, 몽골, 일본 공항까지 들락거렸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이라도 잘 통하고 시간이라도 많아야 그 융통성 없음에 항의라도 할텐데... 내겐 둘다 여의치 않았다.
이런 황당한 일을 겪으면서 한 여행이지만, 무이산에 대한 기억은 어둡지 않다. 밝고 푸르다. 그 공항 직원을 다시 만나면 '하이'하며 웃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태녕과 무이산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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