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에 날개를 달자⓺] 공모전 출품 위해 고민고민 하다가 완성한 첫 문장 그 뒤 문장 부터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그동안 참으로 많이 받은 질문이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있으니 무엇인가 특별한 방법 즉 ‘글쓰기 비법’이 있으리라 지레짐작하고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으면 정말 난처해진다. ‘비법은 없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법 따위는 없어요”라고 딱 자를 수는 없다. 질문을 한 사람이 실망하거나 언짢아할 게 분명해서다.
이럴 때 난 “손가락을 믿고 글을 써보세요”라고 말을 한다. 웬 생뚱맞은 말이냐고? 그렇지 않다. 글쓰기에 있어서 손가락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글쓰기를 할 때, 난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구상을 대략적으로 한 뒤에 첫 문장을 쓰는 편이다. 주제가 분명하고 그 주제를 뒷받침할 근거 자료 같은 소재가 풍부하면 첫 문장을 쉽게 쓰지만, 그렇지 못하면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기도 한다.
하지만 첫 문장을 쓰고 나면 그 뒤에 이어지는 글은 쉽게 쓸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첫 문장에 글의 핵심 주제를 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주장하는 글을 쓸 때는 주장하는 바를 첫 문장에 내지르듯이 쓴다. 그다음부터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근거는 무엇인지를 차분히 설명한다. 생활에서 느낀 에피소드나 추억을 담은 글, 기행문, 서평을 쓸 때도 마찬가지. 주제가 잘 드러날 수 있는 문장을 던진 뒤에 그 이유와 배경 등을 설명한다.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글 한 편을 완성하는데, 온전히 머리로만 글을 쓰는 것은 첫 문장을 쓸 때뿐이다. 그다음부터는 손가락이 글을 쓰게 된다. 글 자체에 논리가 있어서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기도 하고 쓰다 보면 안다고 믿었던 걸 모르는 경우가 있고 몰랐다고 생각했던 걸 알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손가락을 믿고 글을 써보라고 말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문장을 쓸 때 지나치게 완벽해지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서론부터 결론까지 완벽하게 구상하려 하지 말고 생각의 터럭이 잡히면 무조건 쓰는 게 좋다.
또 인내력도 중요하다. 약아빠진 사람은 글쓰기를 잘할 수 없다. 미련할 정도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우직함도 필요하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글은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글쓰기에는 지름길이나 비법이 없다. 만약 비법이 있다면, 비법이 없다는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뿐이다.
‘나는 세입자이다’라는 주제의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쓴 글 한 편을 소개한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뒤에 첫 문장을 완성한 글이다. 그 뒤 문장부터는 그야말로 손가락과 엉덩이의 힘만으로 썼다. ‘여름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다. 이 짧은 문장에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착잡하고 복잡한 속내를 담았다.
<‘반지하도 살 만하네' 했다가, 으악~>
여름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IMF가 온 나라를 뒤흔들던 1998년 여름 휴가철 막바지. 우리 부부는 여행 가방 대신 이삿짐을 싸야 했다. 제자리에 있으면 꼭 그렇지 않은데도 꺼내 놓으면 남루한 게 살림살이였다. 남루한 살림살이만큼이나 우리 부부 신세도 처량했다.
짐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거리로 나서니 아스팔트가 후끈거렸다. 여름은 마지막 남은 열정을 뜨거운 아스팔트에 쏟아붓고 있었다.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지간해서는 마음을 들키지 않는 무던한 아내도 그날만은 갑갑한 속내를 얼굴에 고스란히 달고 있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반지하 셋방이었다. 볕도 들지 않는 반지하에서 돌도 안 된 딸 키울 생각을 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반지하라도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집이라서 눅눅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위안 거리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집주인은 전세금을 돌려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근 한 달 정도를 채근하자 집주인은 어디서 구했는지 전세금의 절반을 돌려줬다. 그 돈 가지고 구할 수 있는 것은 반지하 셋방뿐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사를 해야 했던 이유는 아기 때문이었다. 너무 외진 마을이어서 갓난아기를 키울 수가 없었다.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시장도, 병원도, 변변한 슈퍼마켓도 없었다. 차를 가지고 내가 출근하고 나면 아내와 아이는 그야말로 꼼짝달싹할 수가 없는 신세가 됐다.
전세금을 절반만 받고 이사 하는게 지금은 유별난 일이 됐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 특별하지도 않았다. IMF 한파는 세입자뿐만 아니라 건물주까지 사지로 몰아넣었다. 집값은 폭락했고 은행대출금을 갚지 못한 집들이 경매 시장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세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알몸으로 쫓겨나는 세입자가 허다한 그런 때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리 부부는 그야말로 감지덕지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동안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 혹시 전세금을 몽땅 날릴까 봐 잠 못 이루던 터였다. 당시 집 주인은 실업자 신세였다. 수십 년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무척 곤란한 처지였다. 그러니 감지덕지할 수밖에.
나머지 절반은 형편이 좋아지면 돌려준다고 했으나 우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라 전체가 부도가 났고, 다니던 회사가 폭삭 망한 마당에 어떻게 형편이 좋아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집주인이 써 준다는 차용 증서도 마다하고 결혼해서 2년 동안 살던 집을 '야반도주'하듯 서둘러 떠났다.
반지하도 살만하다는 생각, 물난리 한방에 '싸악~'
반지하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여름에 덜 덥고 겨울에 덜 춥다는 장점이 있어, 그럭저럭 살 만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작 우릴 괴롭힌 것은 '반지하'가 주는 불편함이 아니라 부부싸움 선수인 3층에 사는 중년 부부였다. 부부싸움 경진대회 같은 게 있다면 분명 그 부부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어찌나 심하게 부부싸움을 해대던지, 한 번 터졌다 하면 건물 전체가 고함과 비명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다가는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끝내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울린 다음에야 조용해졌다.
그 일은 딸아이가 세 살 되던 해 여름에 일어났다. 곤한 잠에 빠져있는 새벽녘, 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졸린 눈을 비비고 간신히 눈을 떠 보았지만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그때.
"하천이 넘쳤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이 소리를 듣고 얕은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오니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 있었다.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지만 미처 놀랄 새도 없이 건넌방으로 달려갔다. 세 살배기 딸이 건넌방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넌방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천리나 되는 듯 멀게만 느껴졌다. 천 번 넘게 '제발 무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천 번 넘게 아기를 바닥에 재운 걸 자책했는데도 내 몸은 딸아이가 자는 방에 다다르지 못했다. 건넌방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세찬 빗소리를 뚫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딸아이 울음이었다. '아, 살았구나…' 그 울음은 분명 생명의 소리였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라고 속으로 외치며 방문을 열었다.
천운이었다. 아기는 담요를 타고 물 위에 둥둥 뜬 채 엉엉 울고 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담요가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서 가벼운 아기 몸을 거뜬히 떠받쳐 준 것이다.
그날, 알고보니 하천이 넘친 게 아니었다. 게릴라성 폭우에 토사가 밀려와 하수구를 막아 버렸고, 하수구로 빠지지 못한 물이 반지하로 밀려와 벌어진 물난리였다. 그 당시에 마을 뒷산을 깎아서 터널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건설회사에서 방호벽도 세우지 않고 공사를 진행한 탓이었다.
물난리를 겪고 난 이후 반지하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졌다. 그때부터는 어떻게 해서든 지상으로 올라가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우리 가족은 그로부터 1년 후에 물난리 걱정 없어 보이는 지상 3층으로 이사를 했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전세금 절반 들고 온 집주인
물난리를 겪으면서 세상의 냉정함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고, 자기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건설회사, 집주인 모두 자기들 이익이 우선이었다. 배려, 정의 같은 것은 '이익'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건설회사는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하기에 급급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배상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욕심 많은 일부 집 주인들은 미래에 나올 배상금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치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세입자들은 건설회사와 집주인을 상대로 큰 싸움을 하고 나서야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세입자들이 뭉쳐서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다면 배상은커녕 물난리 원인조차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믿지 못해 가재 눈을 뜬 채 살지는 않았다. 그 반대였다. 난 두 번의 시련을 겪으면서 너무나 소중한 것을 얻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내게 가장 큰 믿음을 심어준 건 이사할 때 전세금을 반만 돌려준 집주인이다. 그는 약속대로 나머지 절반을 1년여 만에 돌려줬다. IMF를 완전히 탈출하지 못한 힘든 시기였는데, 어떻게 그 돈을 마련했는지 모르겠다. 차용증 한 장 없기에, 안 갚아도 법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없는 돈이었는데도 그는 약속을 지켰다.
물난리가 났을 때는 이웃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문을 두드려 나를 깨운 것도 이웃이었고, 무릎까지 차올라온 물을 퍼낸 것도 이웃들이다. 세 살배기 딸아이를 위해 보송보송한 잠자리를 내준 것도 이웃이었고, 우리 가족에게 아침밥을 차려 준 것도 이웃이었다. 그러니 어찌 사람이 믿음직스럽지 않겠는가.
부부싸움 금메달감인 3층 아저씨에 대한 선입견도 물난리를 겪으면서 180도 바뀌었다. 난 그를 벌레 보듯이 했었다.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어쩌다 마주쳐도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눈인사만 하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람은 오래 사귀고 볼 일이라고, 그는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가장 열심이었다. 제 몸 축나는지 모르고, 허리 한 번 펴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물을 퍼냈다. 그 밤에 어디서 구했는지 양수기를 가져와 일을 마무리 지은 것도 그 사람이다. 아마 그 양수기가 아니었다면 우린 밤새 물을 퍼내야 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물을 퍼내면서, 그동안 그를 벌레 보듯한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니 세입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시간이었다. 그 힘든 세월을 그래도 웃으며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 그리고 좋은 이웃들과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며 다 잘될 거라는 열렬한 응원이기도 했다. 길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물난리가 났던 그날 빗소리와 함께 들렸던 딸의 울음소리, 생명의 소리가 내게 힘을 준다. 그때 그 좋은 사람들, 지금도 어디선가 환한 웃음으로 주변을 온통 환하게 밝혀주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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